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자주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버스를 참 좋아해서, 서울 시내 구석구석도 혼자 돌아다니는 게 취미이다보니, 매일 아침 학교만 가도 버스의 설렘을 느끼던 나다. 현관문을 나서면 그날의 여행이 시작되고, 다시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면 그날의 여행도 끝이 나는 듯 했다. 그런 삶에서, 유학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었다. 내가 진짜 'Home'이라고 여기는 곳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기약없는 삶을 사는 것. 여행마저 강박적으로 세세한 일정을 짜는 나에게 유학은 새로운 방식의 고통이었다. 그래서 처음 1년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대까지 겹치며 단순히 집을 떠나 학교를 출근하는 일상조차 발이 묶이자, 더욱 이 고통은 심각해졌다. 아마 그래서, 이 고통을 어떻게든 벗어나거나, 기분이라도 환기시키고자 평소의 소심한 나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이른 휴가를 요청했던 것 같다. preliminary exam을 마치고 거의 2달간의 휴가를 한번에 털어버려야지 했던 초기의 계획조차 접고, 타협해야만 했던 것은 이러다 정말 포기할 거 같아서였다.
일단 포기 대신, 휴가. 지도교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분은 며칠간 하늘을 날았고 한국으로 떠날 준비에 설렜다. 보통의 여행가라면 집으로 돌아가는 날만큼 아쉬운 날도 없을 테지만, 유학생이라는 새로운 지위는 한국으로 가는 행위에 설렘을 실어주더라. 생경했다. 코로나로 인한 수많은 제한을 떠나, 처음으로 Home에 있을 날이 기한이 정해진 상태로 한국에 머무는 것인데, 그 기분은 어떠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한을 모두 소비하고, 이렇게 떠나게 된 1월 1일의 소회는 아쉬움과 설레임 모두가 공존하지만, 전환된 방향에 불안함이 섞여든 오묘한 감정의 소비가 일품이었다는 말로 대신할만 하겠다.
한국어는 몇개의 주요 단어에 수많은 중의적 의미가 내포된 사례가 많은 것 같다. 가령, '집'이라는 단어를 예를 들면 단순히 사람들이 가족 혹은 개인 단위로 사는 공간 하나하나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회귀하면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개인의 그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어에서는 이 단어가 'House'와 'Home'으로 구분되는 경향이 있다. 단어 하나면 그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한국어가 편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Home에 대한 이야기라, 일부러 첫문단에서 부어 Home을 쓰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다. '집'의 사전적 의미를 뒤지고, Home에 대한 번역을 뒤져보아도 특별히 지금 내가 원하는 이 감정을 설명할 단어는 찾지 못했다. 영어의 개념에 조금은 더 익숙해진 것이 아닌가 싶은 유학생의 기쁨과, 내가 원래 쓰는 내 언어의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같이 오긴 하지만, 일단은 집, 그중에서도 Home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기로 한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도 엄밀히는 유학이었다. 흔히들 서울 유학이라고 말하는, 지방 출신 학생의 서울 살이. 본가를 멀리 두고,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살아가는 유학생들. 이런 유학생 자취러들은 자신들이 자취하는 주거 공간을 쉽게 집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자취방, 월셋집, 전세(집), 오피스텔 등등 주거 형태 등을 설명하며 본가와 이곳들을 흔히들 분리하곤 했다. 돌아갈 곳이 있고, 언젠가는 떠나갈 곳에 대한 감정긴축재정 쯤 되는 듯하다. 떠나갈 곳이라는 마음가짐 아래 충분히 정을 붙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허허허 흘린 감정들은 내가 머물었던 그 곳들을 추억으로 기억하며, 좋지 않았던 기억조차 쉬이 미화시켜버리곤 했다. 아무튼 그런 떠돌이 나그네 같은 삶은 어찌보면 부모님이 드디어, 서울에, 부모님의 목표이자 우리 자매의 기대였던 '서울에 집장만'을 하시고 난 후에는 갈대같은 마음조차 뿌리내렸던 것 같다. 집(house)이 집(home)이 되었고, 나는 그제야, 안정을 찾아갔다. 그렇게 약 3년차 살이를 시작할 때쯤, 나는 합격 통지서를 받고 다시 집을 떠날 준비를 했다.
나 스스로 꽤 오랜 세월을 떠돌이 생활을 할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들 자체가 욕심을 내어 해외에 건너가지 않으면 쉽게 인정받지 못하는 분야이기도 했고, 언제나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그 곳에서 남들보다 한발짝 나가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야만 했다. 합격한 그 순간에도, 그리고 그 소식을 알리던 동안에도 모두 행복했지만 문득, 무서운 순간들도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나약한 마음이 언제나 내재된 상태로,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다.
집과 가족은 그런 나약한 이들에게 좋은 버팀목이다. 같이 있어서 위로를 곧바로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공부를 진행했겠지만...유학으로 그 모든 것을 떠나야만 했을 때에는 솔직히 좀 힘들었다. 처음부터 힘들었던 것은 아니고, 생활을 어찌어찌 버티며 힘듦이 쌓였을 때, 그를 위로하고 다독여줄 가족과 집이 너무나 그리웠다. 겨울에라도, 아니 그 다음 여름에라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 코로나가 다가와버렸다. 여행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고 나는 그렇게 힘듦에 무뎌져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잠식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시작할 때 충만했던 자신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연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남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자존감까지 깎아먹는, 우울감에 가득찬 과거의 내가 다시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무서웠다. 그래도 여전히 가족들을 사랑하고 내 돌아갈 뒷배는 우리 집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생각하며, 나름의 한 수로, 휴가를 썼다. 그렇게, 한달 간의 한국행을 결정했다.
따뜻하고 편안한 집에서의 생활은 많은 부분의 나를 회복하게 했다. 불면증 수준으로 잠 부족에 시달리던 것이 사라지고, 10시 반 취침 6시 반 기상이라는 완벽한 8시간 수면 시간을 채우며 패턴을 회복했다. 그리운 한국의 맛은 온갖 배달음식들이 쉽게 다가와 허한 뱃속을 채워주었고, 자가격리를 마친 후에는 엄마의 손맛이 배달음식을 대신했다. 눈이 펑펑, 비가 주룩주룩 내려도 건조했던 기후에서 벗어나 이가 덜덜 떨리는 추위에도 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한국의 기후는 조금 낯설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적절한 수면과 편안한 식사는 일단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하는 생활 사이클에 다시 나를 올려주었다. 가장 큰 회복 포인트가 이것이 아닐까 한다.
자가격리 동안 TV를 라디오마냥 틀어두고, 자다 깨어 먹고 다시 자는 생활만 반복했다. 깨어있을 때 TV 소리가 들려도 참 많은 공상을 했다. 유학 생활 중에는 모든 일에 쫓기듯 불안감에 휩싸여 쉽게 못했던 습관인데, 오랜만에 그저 밖을 바라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상상의 물꼬를 트고 나면 잠시 TV를 보며 웃음을 충전하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고 오늘은 또 무슨 맛있는 것을 먹으면 좋을지 배달 어플을 뒤적뒤적 거리는 말그대로 백수 천하 14일을 거쳤다. 의외로 자가격리는 쉼표가 필요했던 나에게 강제로 주어진 진짜 쉼표였던 것 같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집에서의 첫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길. 엄마가 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사실은 내가 울까봐 걱정이 더 많이 되었다. 사실은 그리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회복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전의 파이팅 넘치던 나에 비하면 여전히 모자랐고,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휴가의 가장 큰 목적인, '나의 뒷배 확인하기'가 이를 나름 안정시켜주었다. 든든한 가족들이 한국의 집(home)에 버텨주고 있는데, 실패하면 뭐 어때? Why not?이다. 우리는 모두, 거처가 확실하지 않은 불안정한 유학생이지만, 말을 조금만 달리하면 우리는 모두 한국에 돌아오면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줄 home 이 있는 것이다. 유학생활은, 불안감과 지루함을 탈피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백업플랜이 버팀목이 되어 공격적인 공부를 해나가는 사람들이 끝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젠,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해나가야할 때가 되었다.
다시, 궤도에 오른다. 미국에 돌아가, 공부의 쳇바퀴에 다시 오르는 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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