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조금 더 나은 하루였고, 오늘도 조금 더 나은 하루였다.
그룹 미팅에서 리서치 발표를, 이렇게 혼나지 않고 한 적이 얼마만인지? 수 일간 노력했던 40장이 넘던 정돈되지 않은 슬라이드를 trim 해서 고작 열 몇 장 짜리로 만들었을 때, 완성은 했다 싶었지만 이거밖에 안되다니, 하는 생각도 들고. 꾸역꾸역 마지막까지 뽑아낸 데이터를 집어 넣고 발표했을 때, 간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혼나거나 하지 않고 흥미를 이끌어냈을 때. 농담까지 한마디 해가며, 웃음으로 발표를 마무리했을 때, 드디어 오랜만에, 삶의 어느 한 조각은 조금 나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잘하는 것과는 별개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둘 다 잘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고, 그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부러워만 하면 하등 나에게 도움될 것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름대로 노력헀다.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생각보다 많았다. 핑계지만 코로나도 많은 기회와 시간을 박탈해갔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이 시험을 남들보다 미뤄야할 수도 있다는 압박감은 커져왔고 그러면 그럴 수록 회피하고 싶었다.
회피를 거듭하다가 결국 실패하게 된 친구를 마주했다. 그 아이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더 나은 사람일 수 있었고, 더 예의바른 행동으로 실패마저 정중한 포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충분한 노력을 투자했는데도 실패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내 운명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방향이 정해졌다.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다행히도 눈 앞에 할 일이 산재해 있었고, 한 일이 벅차면 그저 다음 일을 손에 쥐고 하면 되었다. 실험실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럼에도 가시적으로 큰 변화가 오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교수 앞에서는 머뭇머뭇 영어를 내뱉고,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면서 다시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정리하여 가져오라는 지시에 아쉽게 절망하곤 했다. 처음 수 일은 정말 힘들다. 그래도 내가 많이 단단해져있었나보더라. 한참 꾸중 같은 지시를 듣고 나서 나오는 길은 절망스러운 발걸음이지만 다음 날 아침 학교를 향할 때면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못했던 걸 어쩌겠어? 다시 조금이라도 더 나아져서 가져가면 되지. 최근 새벽 3시까지는 잠조차 오지 않는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있어서 사실 스스로 좀 이상해졌나 싶었다. 잠을 너무 못잔 탓에, 이상한 형태의 자신감이 와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도 그게 도움은 되었다. 예전의 회피형 성격 대신, 일단 상의를 하게 되고, 혼나더라도 너무 큰 상처를 받지 않았고 결국 다시 나를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주 조금씩, 삶은 나아지고 있었다. 어느 날은 교수님의 말이 'I can see you are improving~'으로 시작했다. 물론 그 다음 말은, but, 이어서 슬펐지만 말이다. 또 다른 어느 날에는, 불현듯 교수님이 우리 실험실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가장 높은 친구의 연차가 나를 당연하다는 듯 짚었을 때. 그리고 고맙게도 그 친구는, 오늘 퇴근길에 나에게 'I don't know anybody tell this to you, but you're doing a great job' 이라고 말해주며, 오늘 가장 기쁜 순간을 선물해주었다.
나의 노력을, 나를 위해 하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알아준다면 더 기쁘고 행복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런 칭찬을 막상 듣고 나니 어색하면서도, 정말 뛸 듯이 기뻤다. 다만 유난스러워 보일까, 표현을 참았을 뿐. 돌아오는 길에서는 눈물이 찔끔찔끔 났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기뻐만 하기엔 너무 이르다. 오늘도 못난 글을 고치다, 새벽 두 시 쯤에는 잠이 들려나? 그래도 조금 더 나아진 기분으로,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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