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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Review/21C Film Review

패신저스(Passengers, 2016)

by Eunbyeol_Eby 2018. 1. 7.

공간만 다른 폭력적 욕망

패신저스(Passengers, 2016)

 

 

My Rate : ★★*** (2.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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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Log

2017.01.07 CGV 신촌아트레온

 

 올해의 첫 극장 나들이는 어떤 영화로 해야할지, 정말 많은 고민을 앞둔 상태였다. 올해의 첫 영화로 야심차게 선택한 영화였던 '코요테 어글리'가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던 터라 약간은 강박을 갖고 영화를 고르고 고르다 골라낸 영화가 '패신저스'였다.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들을 다 놓쳤던 나로서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하나 더 개봉한다는 점은 굉장한 매력 포인트였다. 포스터에서 강조된 '깨어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라는 문구는 두 사람이 우주선 안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 상상할 수 있게 돕는 좋은 문구라고만 생각이 들었다. 막상 영화를 보고난 후에는 이 모든 기대가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크리스 프랫이 왜 이 영화를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 최고라고 극찬했는지, 제니퍼 로렌스는 대체 왜 이 영화를 선택한 건지 의문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행성의 개척자가 되기 위해 떠나는 우주선에서 동면기의 원인 모를 오류로 깨어난 짐은 절망에 빠진다. 지구에 이 문제를 알리기에도,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기에도 이미 시간이 부족한 상황.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위로가 되어준 것은 인공지능 바텐더 뿐이다. 점점 삶을 포기하는 것에 가까워지던 순간, 다른 동면기에서 잠들어 있는 오로라를 발견한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나머지 오류 없는 4,999개의 동면기 중 하나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던 오로라는 오로지 짐의 결정으로 강제로 깨어나게 된다. 동면기를 조작해 오로라를 깨웠다는 사실은 숨긴 채, 짐은 천연덕스럽게 군다. 광활한 우주선 안, 오직 젊은 두 남녀 뿐인 상황. 절망에 빠졌다고 해도 결국 기댈 수 있는 서로가 있는 상황에서 오로라는 짐과 사랑에 빠진다. 인공지능 바텐더에게 한 단 하나의 실수로 비밀을 들키게 된 순간, 오로라는 극도의 분노와 절망에 빠진다. 오로라가 짐에게서 등을 돌린 그 때, 우주선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서 승무원 한 명이 깨어나 이들에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우주선의 문제를 해결한 후, 이들에게는 단 한명만이 다시 동면해 개척지에 도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짐은 오로라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오로라는 짐과 함께하는 여생을 선택한다.

 한국 드라마는 의사가 나오면 의사가 사랑을 하고, 변호사가 나오면 변호사가 사랑을 한다고들 말한다. 이 영화도 그런 속성을 가진 것 마냥, 우주에서 사랑을 한다고 정리하기엔 이 사랑은 너무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다. 짐이 깨어난 이유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오로라는? 오로라는 그저 짐에게 외양을 통해 선택되었다. 지나가는 대사 마저도 소름끼친다. 이런 여자와 사랑을 한번 해보고 싶다. 오로라를 깨우기 전까지 오로라가 쓴 글들을 읽고, 그녀의 인터뷰를 보고, 혼자 사랑에 빠지고 격정적으로 변해가는 부분은 배경만 우주인 스토킹을 보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삶으로 납치한다. 새로운 행성으로 얌전히 향하고 있던 그녀를, 멈춰버린 자신의 삶으로 납치한 것이다. 처음에 아무 것도 몰랐던 그녀는 마치 실수로 이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했고, 혼란스러워했지만 괜찮아졌고 이내 짐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서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짓을 자신에게 저지른 것을 알았을 때, 나라면 절대 그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여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저지른 폭력적인 선택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과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나타난 유일한 조력자마저도 짐을 변호한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치 현실 세계의 남성들이 여성 피해 범죄가 일어나면 가해자에게 이입하는 현상을 영화에서 재현해놓은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남자가 선심쓰듯 준 유일한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그녀는 연민을 느낀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연민을 느낄 수가 있지? 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특히나 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다시피 한 승무원의 등장과 죽음은 너무나 어이없고 당황스럽다. 수많은 힌트들을 마지막에 잔뜩 뿌리고, 잔뜩 회수한다. 영화는 오로지 오로라의 희생으로 짐을 행복하게 만들고 마무리된다. 심지어 부자인 오로라가 평범하고 모자란 듯 했던 짐의 인생에 꽃이 피게 만든다. 오로라에겐 너무나 가혹한 인생이다.

 여성의 가치가 이렇게 폄하된 영화는 피하고자 할 때, 흔히들 백델 테스트를 떠올린다. 이 영화는 공식적인 등장인물만 세어 보아도 남성 캐릭터 셋, 여성 캐릭터 하나로 이 백델 테스트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하필 새해의 첫 극장관람 영화였다는 게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 2018.10.03 다른 이들의 영화 리뷰를 읽으면서 추가하고 싶은 점이 생겨, 다시 글을 수정한다. 외국 영화를 볼 때 생기는 특유의 늦은 정보 효과 같은 이 내용은, 제니퍼 로렌스의 캐릭터 이름이 다름아닌 '오로라' 라는 점이다. 이 이름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영화의 전체 맥락마저 관통한다. 내재되지 않은 문화를 학습하여 기억하는 것의 한계를 느낄 때가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이야기는 다른 어떤 디즈니 영화들 보다도 수동적인 여성의 이야기에 속한다. 주인공 오로라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 부모의 실수로 초대받지 않은 마법사가 내린 저주-16세에 물레바늘에 찔려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고, 그로 인해 깊은 잠에 빠진다. 축복을 내리러 왔던 마법사들 중 마지막 마법사 (12번째 혹은 세번째, 버전마다 달라진다)는 이 저주를 완화시켜 물레에 찔려 100년간 깊은 잠에 빠질 것이고 왕자의 키스를 받으면 저주가 풀릴 것이라 선포한다. 부모와 마법사들은 왕국에서 물레를 모두 없애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저주를 내린 마법사 말레피센트의 속임수로 결국 잠이 든다. 그리고 100년 후, 숲 속 어느 왕국에 잠들어있다는 공주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왕자가 잠들어있는 공주에게 키스하여 저주는 풀리고 깨어난 공주는 왕자와 결혼한다. 이 간략한 줄거리는 모든 이야기의 공통된 뼈대인데, 오로라가 스스로의 의견과 생각으로 한 일은 하나도 없다. 마법사들을 불러 축복을 내리고자 한 것은 부모의 욕심이었고, 한 명을 빼먹은 것은 부모의 실수였으며, 물레바늘에 찔린 것은 말레피센트의 계획이었으며, 잠들어있는 공주에게 공주의 의견은 생각하지도 않고 키스한 왕자는 화룡점정이다. 이야기 전체에서 오로라는 자신의 힘으로 결정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영화 '패신저스'가 위와 같은 오로라 이야기의 한계점을 지적하거나 풍자하는 영화일 수는 없다. 풍자점을 만들려면, 둘 밖에 없는 공간에서 강요된 그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정도, 즉, 혼자 다시 잠드는 것을 택하는 것 정도가 이 영화를 다르게 평가할 조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오로라는 강요된 선택이 자신의 선택인 것으로 여긴다. 영화의 각본가들은 그저 자신들이 새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오로라 공주의 이야기 같다며 이름을 가져다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공포와 두려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쓴 이야기이다. 다시금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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